"나는 포커 상대의 경동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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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 브런슨은 1950년대 텍사스 서부의 위험한 골방에서 직업 도박꾼의 삶을 시작해 포커가 건전한 오락스포츠로서 ESPN에 생중계되는 시대로 나아가게 한 주역이다. '월드시리즈오브포커(WSOP)'를 두 차례나 석권한 그는 프로로서 수많은 전설을 남겼고, 프로 포커의 품위를 강조하며 포커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포커의 전설이자 역사, 아이콘으로 불렸다. 2011년 7월 라스베이거스 리오 올스위트 호텔 카지노에서 열린 WSOP 테이블의 그.
미국 영화 ‘라운더스(Rounders, 1998)’는 뉴욕 명문대 법대생 마이크(맷 데이먼)가 우정 때문에 포커판에 뛰어들어 발버둥치다 마침내 자신의 ‘정의’를 이루는 이야기다. 연인까지 잃는 긴 발버둥과 짧고 강렬한 승리. 영화는 마이크가 포커 최강자들과의 진검승부를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면서 끝이 난다. 영화 덕(탓)에 포커 붐이 일고, 적잖은 이들이 프로 포커의 세계를 선망하게 됐다는 후일담이 있다.
영화에서 마이크는 고비 때마다 전설적 포커 구루들의 명언을 자기 상황에 겹쳐 보곤 한다. 거기 도일 브런슨(Doyle Brunson)이란 이름이 무려 세 차례, 마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을 언급하듯 아무 소개도 없이 등장한다. 전세계 포커 팬들이 골프의 타이거 우즈나 농구의 마이클 조던처럼 우러렀고, 포커 게이머들의 꿈의 경연장이라는 ‘월드시리즈오브포커(WSOP)’ 무대에 만년의 그가 등장하면 전세계에서 모인 내로라하는 프로 포커들이 약속이나 한 듯 기립박수로 맞이하곤 했다는 사람.
브런슨은 1970년 WSOP 1회 대회 때부터 만 85세였던 2018년까지 빠짐없이 출전해 부문별 이벤트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황금 팔찌(bracelet)를 무려 10개(역대 통산 2위)나 거머쥐고, 왕중왕전 격인 메인 이벤트에서 2차례 우승한 월드 챔피언이다. 그는 대회 상금이 근년과 비교도 안 되게 적던 70년대에 프로 포커 역사상 처음 상금 100만 달러를 돌파하며 평생 '라이브 포커' 공식 상금으로만 620만 달러를 땄다.
하지만 그가 존경받은 것은 기량과 성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포커가 마약-도박과 다를 바 없던 1950년대 미국 텍사스 남부의 후미진 골방에서 허리에 권총을 차고 프로 도박에 입문해 포커가 건전한 오락스포츠로 ESPN 등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으로 생중계되고 공중파 고정 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시대로 나아가게 한 주역이었고, 포커에 씐 종교적-도덕적 오명들을 걷어낼 만한 철학과 매너, 품위를 지탱한 포커 홍보대사였다. 정치-스포츠-연예계 명사들이 앞다퉈 그와 포커 게임을 해보려고 줄서곤 했다는 ‘텍사스 돌리(Texas Dolly, 애칭)’ 도일 브런슨이 별세했다. 향년 89세.
"진정한 포커는 무제한 텍사스홀덤"
네바다대 역사학자 데이비드 슈워츠는 ‘도박의 역사’(홍혜미 등 옮김, 글항아리)란 책에, 구석기 인류가 짐승 뼈를 굴려 주술적 선택을 도모하던 때부터 도박이 시작됐다고 썼다. 유희와 쾌락, 부의 욕망 이전에 근원적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와 생존의 희망이 인류 내면에 도박 유전자를 심었다는 것. 종교-관습-법-제도의 집요한 견제에도 도박이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진화해 온 까닭을 슈워츠는 그렇게 풀이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복권이나 경마 등을 빼고, 고전적이고 노골적인 도박이 제한적이나마 합법화된 세월은 약 100년에 불과하다. 그중 포커는 가장 정교하게 진화한 장르 중 하나이자, 오락-스포츠를 넘어 크고 작은 국제 대회까지 열리는 도박이다. 다양한 포커 게임 중에서도 ‘텍사스홀덤(Texas Hold’em)’은 거의 모든 국제대회가 채택한 최고의 형식. 각 선수가 2장의 히든 카드와 5장의 공개 카드를 차례로 받으며 매번 유불리를 따져 돈을 건(베팅) 뒤 5장 카드 조합 서열로 최종 승패를 가르는 경기. 영화 ‘라운더스’의 브런슨에 따르면 “무제한(no-limit) 텍사스홀덤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진정한 포커”다. 베팅에 한도를 두지 않는 가장 공격적이고 격렬한 포커. 텍사스 카우보이의 후예인 브런슨의 포커 스타일이 그러했다.
브런슨은 대공황 그늘이 짙어 가던 1933년 텍사스 서부 롱워스(Longworth)의 농부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 주민은 모두 200여 명. 아버지는 손으로 수확한 목화를 파운드(약 0.45kg)당 1센트(현재 기준 약 11원)에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브런슨이 6살 되던 해에 집에 전기가 들어왔고, 상수도가 들어온 건 10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는 달랑 3명뿐이던 또래들과 돌팔매질로 전봇대 맞히기 내기를 하며 성장해 고교시절 육상(달리기)과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주 육상대회 1마일(1.6km) 종목에서 우승했고, 학교 농구부를 주 토너먼트 4강까지 진출시킨 주역이었다.
포커를 배운 건 1949년 농구 준결승 전날 밤이었다. 응원차 오스틴까지 함께 온 급우들의 성화에 즉석에서 룰을 익혀 모텔 방에서 벌인 생애 첫 게임. 그는 판돈을 쓸어 담다시피 했다고 한다. 농구시합에선 졌지만 그는 여러 대학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고, 침례교 계열 하딘-시몬스(Hardin-Simmons)대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그는 매달 세탁비 명목으로 지급되던 장학금 15달러를 밑천 삼아 학내는 물론이고 텍사스대, 칼리지스테이션 등 주내 큰 대학가를 순회하며 포커로 용돈을 벌었고, 상습 도박 때문에 학교징계위원회에 5차례나 회부됐다. 운동 기여도 덕에 징계를 면하며 졸업 연도엔 갓 출범한 미 프로농구(NBA)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Lakers)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았다. 4학년 여름 방학, 공장 아르바이트 도중 석고보드 더미에 깔려 오른쪽 다리뼈 복합골절을 당하면서 NBA 꿈이 꺾였다. 2009년 그는 운동선수로서 모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피스톨을 찬 카우보이 포커꾼
앞날이 막막했지만 포커가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당시 포커는 도박-사기의 동의어였고, 도박꾼은 마약-알콜 중독자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아버지(58년 작고)를 비롯한 친지들의 시선을 두려워했다. 시간을 벌 겸 대학원에 진학해 교육학- 경영학 석사 학위를 땄지만 교사 연봉을 알고는 한사무용품 업체 세일즈맨으로 취업했다. 입사 7개월 동안 단 한 대도 못 팔고 눈칫밥 먹던 어느 날 그는 전화 영업을 위해 들른 한 당구장에서 포커판에 끼어든다. 훗날 그는 “불과 3시간도 안 돼 한 달 월급을 쓸어 담았다(cleared). 내가 팔러 다니던 업소용 계산기도 필요 없는 계산이었다”고 말했다. 1956년, 만 23세 청년의 은밀한 이중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주무대는 “도둑이나 포주, 살인자 말고는 아무도 근처에 안 가던,(…)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위험한 거리”였다는 텍사스 포트워스(Fort Worth) 익스체인지 거리의 유흥가 골방.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지만 뭔가 벌어지리란 건 모두가 알던” 거기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카우보이 모자에 권총(피스톨)을 찬 채, 수없이 체포-연행되고 돈을 빼앗기고 강도 총에 포커판 멤버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목격하며, 또 도망다니며 ‘타짜’ 명성을 이어갔다. 그리곤 60년대 말 '마이크'처럼,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그는 훗날 WSOP의 전설이 된 토머스 프레스턴(Thomas Preston Jr.), 브라이언 로버츠(Brian Roberts)와 팀을 꾸렸다. 셋은 포커판에서 상대의 속임수를 견제하고 위기에 함께 대처하며, 마피아 등 조직 범죄자들이 장악하다시피 했던 라스베이거스의 70년대를 헤쳐 나갔다.라스베이거스 다운타운 호스슈(Horseshoe) 카지노 업주 베니 비니언(Benny Binion)이 70년 WSOP 1회 대회를 개최하며 초청한 30명 남짓의 일류들 속에 그들 3인방도 당연히 포함됐다. 댈러스 범죄조직 두목 출신 살인 전과자 비니언은 같은 텍사스 출신인 브런슨을 아끼며 보호했다고 한다. 비니언에게 WSOP는 일종의 카지노 홍보 쇼였고, 당연히 신문-방송 기자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룰렛 등이 대중적 오락이라면 포커는 꾼들의 도박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초기 브런슨은 가명(Adrian Doyle)을 썼다. 72년 대회 메인 이벤트 결승 때는 승승장구하다 말고 대회장이던 베니의 아들 잭에게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싫다"며 돌연 퇴장하기도 했다. 월드 챔피언 영예와 8만 달러 우승 상금은 3인방 중 한 명인 프레스턴이 차지했다. 명예나 성취욕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5일 연속 먹고 쌀 때 빼고는 단 한 번도 포커 테이블에서 일어서지 않은 적도 있었다"는 그는 상금 욕심보다 가족 친지를 실망시킬 일이 더 두려웠다.
하지만 76년 메인 이벤트는 이기기 위한 자리였다. 돈도 돈이지만, 죄의식과의 싸움에서 이겨 당당해지기 위한, 포커의 명예를 보여주기 위한 싸움. 그는 첫 두 장 히든 카드로 10과 2을 받았다. 홀덤포커에서 “완전 쓰레기”라 할 만한 최악의 패였다. 그는 결승 테이블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베테랑 제시 알토(Jesse Alto)를 상대로 그 특유의 ‘포커 페이스’와 절묘한 신경전을 펼치며 마지막 카드(river)에서 ‘풀하우스(full house, 10 3장, 2 2장)’로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메인 이벤트에서도 게리 벌랜드(Gary Berland)를 상대로 똑 같은 ‘쓰레기 카드(10과 2)’를 쥐고 게임을 시작해 거의 동일한 각본에 따라 10 풀하우스로 승리했다. 전세계 팬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메인 이벤트 연승 대기록을, 기적적인 역전극으로 이뤄낸 거였다. 포커 팬들은 지금도 10과 2를 ‘도일 브런슨 카드’라 부른다.
포커의 관건은 기억력과 인간에 대한 이해
일류 포커 선수가 되려면 구도자의 평정심과 고공 점퍼의 담력, 체스 챔피언의 두뇌가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패)을 잘 감추고 상대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브런슨은 "기억력과 인간(상대)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라고 요약했다. 그는 상대를 읽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로 경동맥을 꼽았다. 표정과 눈빛, 숨소리는 위장할 수 있어도 심장은 거짓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경의 변화가 초래하는 혈류의 변화는 의지나 훈련으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근년의 프로 포커 선수들은 마스크나 선글라스, 후드티로 아예 얼굴을 가린 채 테이블에 앉기도 한다. 브런슨은 그걸 못마땅해 했다. 발가벗고 앉아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야말로 포커 게임의 본질적 영역 가운데 하나라 여겨서였다. 그는 평생 버튼다운 셔츠에 스포츠코트, 하얀 카우보이 모자를 단정히 쓰고 경기에 임했다.
그는 62년 약사 아내(Louise Carter)와 결혼해 해로하며 1남 2녀를 두었다. 연애 초기 자신을 마권업자(bookmaker)라 소개했는데, 아내가 회계원(Bookkeeper)으로 알아들고 데이트에 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돈이 없어 처남이 일하던 장례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증명서도 친구 로버트가 루이즈와 함께 법원에 가서 받아왔다고 한다. 당시 그는 “돈이 필요해서” 포커를 하는 중이었다.
브런슨은 79년 ‘포커의 바이블’이란 평을 듣는 ‘도일 브런슨의 슈퍼/시스템’과 자서전 등 6권의 책을 냈다. 공식 대회에 참가비를 내고 출전해 성적에 따라 받는 라이브 토너먼트 공식 상금 외에, 현금을 갖고 벌이는 캐시 포커로 그가 평생 번 돈은 아무도 모른다. 그는 훗날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젊은 플레이어 중 한 명"이라고 평한 칩 리스(Chip Reese)에게 한 자리에서 600만 달러를 잃은 해를 빼곤 평생 단 한 해도 적자를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무능한 사무기기 판매원이던 그는 금-에메랄드 광산과 타이태닉-노아의 방주 발굴 사업에 투자했다가 큰 돈을 잃었고, 포커꾼 답지 않게 기독교방송국을 설립해 크게 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기-도박 충동은 평생 전방위로 뻗었다. 비만으로 고생하던 그는 2003년 무렵에는 포커 테이블에서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 정도(약 180kg)였다고 한다. 그는 게임 동료들에게 즉석 내기를 제안했다. 2년 내 100파운드(약 45kg) 감량에 돈을 걸라는 것. 평생 그를 지켜봐 온 동료들은 1/10 확률로 내기에 응했고, 브런슨은 10만 달러를 걸었다. 실패하면 돈을 잃고 성공하면 100만 달러를 버는 내기. 1년 동안 단 10파운드도 못 뺀 그는 2년째 특유의 승부욕을 발휘하며 최종시한 몇 주 전 98파운드나 뺐다. 그는 동료들에게 지금 패배를 인정하면 2%를 깎아주겠다며 다시 '선택'을 제안해 98만 달러를 받아냈지만 그날 포커로 그 돈을 모두 잃었다.
포커전문지 ‘블러프(Bluff) 매거진’은 2006년 1월 포커 전문가 설문조사를 통해 역사상 가장 존경 받고 영향력 있는 ‘포커 파워 20’을 선정 발표했다. WSOP 팔찌 16개로 역대 최다 보유자인 필 헬무스는 5위, 포커 대중화의 일등공신인 ESPN이 2위였다. 1위는 도일 브런슨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해주는 게 당연히 기쁘지만 한편 불편하다고 말했다. “인기는 양날의 검이다. 내가 플레이를 할 때마다 방송 중계자들은 내 책 내용을 인용하며 감탄하곤 한다. 아첨 같기도 하고, 화도 난다. 할 수만 있다면 익명의 포커 플레이어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게 최고의 삶이니까.(…) 하지만 이제 '판돈'이 너무 커졌다. 포커는 더욱 커질 것이다.”
브런슨은 NBC 포커쇼 ‘Poker After Dark’에 출연해 “우리는 늙어서 포커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포커를 그만둬서 늙는다”고 말했고, “당장 포커 테이블에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나는 행복하게 죽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2018년 은퇴 전까지 1년 365일 중 300일을 포커장에서 살았고, 은퇴 후에도 최소 주1회는 자기 사진이 걸려 있는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레전드 룸’ 등에 전동 카트를 타고 나타나곤 했다. ‘텍사스 먼슬리’ 기자는 포커 팬들에게 “브런슨은 골프 팬들에게 타이거 우즈와 같은 존재”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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